두 손을 솥 손잡이에 걸었다.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다. 당근, 양파, 셀러리를 툭툭 잘라 솥에 던져 넣었다. “치익.” 하얀 김과 함께 공격적인 소리가 났다. 라구(ragu) 소스를 만드는 날이었다. 그날이면 온종일 주방에 그윽한 냄새가 돌았다.
라구라는 말은 본래 ‘스튜(stew)’에서 왔다. 말인즉슨 오래 진득이 끓였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지역에 따라 여러 라구 소스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볼로냐의 ‘라구 볼로네즈(Ragu Bolognese)’다. 다진 채소와 고기를 볶다가 와인과 토마토를 넣고 푹 끓이면 된다. 혹시 실수라도 하면 말총머리를 했던 부주방장 다니엘은 자신의 모국이 모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방방 뛰었다. “오 노! 맘마미아!” 말도 안 되는 감탄사가 다니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위험에 빠진 라구 소스를 구하기 위해 큰 솥을 당겨 잡았다. 마치 부상한 전우를 부둥켜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소스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 상수역 근처 골목, 장작을 앞에 쌓아둔 ‘브렛피자’에는 볼로냐에서도 흔히 찾기 어려운 클래식한 스타일의 라구 소스 파스타가 있었다. 반지하에 가까운 이곳에 들어서면 정갈하고 깨끗한 실내에 마음이 놓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나 없는 주인장처럼 나오는 음식들도 있어야 할 맛이 있고 없어야 할 맛은 없었다.
이곳 피자는 빠르게 구워 도우(반죽)에 수분이 남아 있는 나폴리 정통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신 살짝 낮은 온도에서 비교적 길게 익혀 잘 구운 빵을 먹는 듯한 맛이 났다. 반짝이는 산미, 짝짝 달라붙는 염도, 향긋한 올리브 오일, 순백의 치즈, 이 모두가 어우러진 ‘마르게리타 피자’는 맛이 정밀했다. 한우 사태, 차돌박이, 목심, 힘줄, 뼈를 써서 만든 ‘탈리아텔레 라구’는 반대로 이탈리아 시골 어딘가 멀리 소가 풀을 뜯고 포도가 익어가는 풍경처럼 은근한 열기와 느긋한 시간의 힘이 뭉근하게 다가왔다. 토마토를 적게 넣어 낮아진 산미 대신 육중한 육질이 로마 전차처럼 끝없이 전진했다.
조금 더 북쪽 신당동 버티고개역으로 가면 이탈리아 사람이 운영하는 ‘브레라’가 있다. 곳곳에 놓인 와인병과 비닐로 싼 메뉴판을 보면 이탈리아 로마 뒷골목, 연인들이 파스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서로의 와인잔을 채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은 파스타를 인분이 아니라 무게 단위로 판다. 메뉴를 고르기 전 탄수화물을 줄여야 한다는 뉴스를 잊는 게 순서다. 주문을 넣으니 한국어가 서툴지만 미소는 어색하지 않은 점원이 주방에 고함치듯 메뉴를 외쳤다.
달달 볶듯 익혀 무쇠 팬 채 나오는 카르보나라도 좋지만 역시 이곳에서는 라구 소스를 듬뿍 넣은 라자냐를 먹어봐야 한다. 라구 소스와 우유·버터·밀가루로 만든 베샤멜소스가 다섯 겹 깔린 라자냐를 케이크 먹듯 포크로 떠서 입에 푹푹 넣었다. 맨 위에 구워진 모차렐라 치즈를 옷 찢듯 쭉쭉 찢었다. 할머니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이 집 라자냐를 먹노라면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Sopranos)’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성당의 젊고 잘생긴 신부, 그에게 집에서 구운 라자냐를 선물하는 주부 신자들, 그리고 레드와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드라마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라구 소스 기행은 강남 압구정 어귀 ‘피치(Pici)’에서 끝났다. 피치는 굵은 이탈리아 파스타 종류 중 하나다. 모든 파스타를 손수 생면으로 뽑아내는 이곳은 어둡고 차분했다. 주문과 함께 나무 상자에 생면을 담아 손님에게 보여주며 설명한 뒤 그 면을 주방에 가져갔다.
드라이 에이징(건조 숙성)한 스테이크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는 고딕풍 성당처럼 웅장하고 오래된 맛을 냈다. 공기 중에 서서히 수분을 날려가며 얻은 발효의 맛에 가까웠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에 매긴 정당한 맛과 값이었다.
파스타는 반대로 마치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을 보는 듯 화려한 색감과 재료의 기하학적인 배치에 눈이 갔다. 갑각류를 구워 뽑은 비스크 소스에 랍스터 살이 넉넉히 올라간 ‘아라고스타’, 새우살을 넣은 작은 만두에 가까운 아뇰로티 파스타를 토마토소스에 익혀낸 ‘페스카토레’에서는 칼을 간 요리사의 기개가 느껴졌다.
소꼬리와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을 써서 만든 라구 소스와 구운 뼈 골수가 함께 나온 ‘라구 파스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동아줄 같았다. 굵은 붓을 써서 짙게 칠한 유화처럼, 혀에 두껍게 달라붙는 소스의 저 깊은 곳에는 이 소스를 젓고 또 저은 요리사의 땀이 있었다. 오래전 나를 뜨겁게 달구던 주방의 열기도 있었다. 젊음도, 청춘도, 그 무엇을 희생하여도 아깝지 않던 오래고 오랜 맛이 있었다.
#피치: 라구 3만4000원, 아라고스타 3만6000원, 페스카토레 3만4000원,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 스테이크 2만5000원(100g).
September 05,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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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Pick] 혀에 달라붙는 진한 소스... 요리사의 땀과 주방 열기 농축된 맛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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